지은이

정지아: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1947년부터 비합법 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구빨치’였다. 그녀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집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한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부모님의 삶은 그녀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연좌제로 자식의 삶까지 비틀리게 만든 보수 독재정권 치하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생운동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 부모님의 삶을 소설로 옮긴 《빨치산의 딸》(전 3권, 1990년 실천문학사 간)은 세간의 화제를 모았지만 출간 직후 판금조치 당했고, 출판을 담당한 실천문학사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노동해방문학’ 활동으로 이미 수배 중인 참이었다. 몇 년간의 수배생활을 끝낸 그녀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실로 복귀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운동세력이 부침을 겪던 1990년대 초반 이후 침묵하던 그녀는 지난 해 사회주의자들의 쓸쓸한 말로를 그린 중편 <행복>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하는 등 다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차례

휘파람 부는 남자, 최정규
선상님 손은 약손, 조부덕
인터내셔널 핸섬 킴의 원더풀 라이프, 김용한
절벽 위에 핀 희망의 꽃, 김웅

고단한 사람들의 이웃, 장명숙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 정용오
실험실 밖으로 나온 과학자, 신명호
이야기 들려주는 여자, 최순영

통 큰 가시내, 한지숙
시대의 어둠을 넘어 나를 넘어, 이선근
헌책방의 보헤미안, 류한승
영원한 아웃사이더, 바닥씨의 세상읽기, 화덕헌

작가 후기

책속에서

아침 안개가 햇살에 조금씩 흩어지면서 청둥오리와 백로 떼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풍경도 사라질 것 같아 절로 한숨이 난다. 강 주변에 들어찬 과수원과 비닐하우스에선 엄청난 농약을 쓰고 있고, 주말이면 낚시꾼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문제를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은 해결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최정규는 쉽게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남아 있는 일 퍼센트의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지금까지 그가 휘파람을 불며 살아온 것은 그의 인생이 남달리 행복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 때라도 희망은 있었고, 그 희망 때문에 그는 절망의 심연에서도 휘파람을 불 수 있었던 것이다.(11쪽, 휘파람 부는 남자, 최정규 중)


조부덕은 천 원 한 장이면 사고도 남을 한 줌의 상치, 쑥갓에 함지박만하게 입이 벌어진다. 돈이 중요한 세상임을 애들 키우고 사느라 절절이 실감하면서도 진료비보다 그것들이 더 반가운 그녀다. “이거시 세상 사는 맛이제? 안 그냐?”(57쪽, 선상님 손은 약손, 조부덕 중)


장승백이 문화당에서 청년은 낯익은 책을 뽑아든다. 김산의 《아리랑》. 청년은 고등학교 시절 《아리랑》을 읽었다. 그는 누군가 붉은 펜으로 밑줄을 긋고 여기저기 단상을 적어놓은 낡은 책을 뒤적인다. 몇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던 청년의 시선이 멈춘다. 하단 부근에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다. 붉은 밑줄은, 눈물 때문인지 침 때문인지 작은 얼룩 속에 불그스름하게 번져 있다. “내 인생에서 오직 한 가지를 제외하고 나는 모든 것에서 패배했다-나는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262쪽, 헌책방의 보헤미안, 류한승 중)


그들이 열심히 제 몫의 생과 역사적 책무를 견디며 살아오는 동안 하릴없이 세계의 밖을 배회하던 나에게 과연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쓴 글은 아니다. 내가 도움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의 뜨거운 생의 에너지가 나른한 내게로도 옮겨와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마침 봄이다. 긴 겨울 동안 죽은 듯 움츠리고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저 들의 꽃과 나무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만났던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내게로 스며 내 긴 잠을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나, 두리번거린다. 만났던 모든 분들의 기를 받아 한 발 어디로든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란다. 어디면 어떠랴. 내딛는 첫발이 중요하다. 아직 길은 어디로든 열려 있다.(309~310쪽, 작가 후기 중)